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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03
2021 SPRING

KCL LIFE, 당신의 삶에 안전함의 점을 찍다

오늘도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 배우 이순재

이재영 사진 김지원

모두에게 공평하게 흐르는 게 시간이라지만 누구나 깊이를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50주년을 맞은 KCL의 시간만큼 한 곳으로 파고들어 자신만의 길을 만든 배우 이순재. 배우로 스승으로 사람들의 정서를 어루만지는 예술가로 그는 오늘도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간다. 연극 <장수상회> 공연 중인 배우 이순재 님을 만났다.

연극 <장수상회> 공연중이십니다. <장수상회>는 영화로도 발표되었는데 연극과 영화의 다른 점이 있을까요?

연극이 영화보다 조금 더 사실적이고 현실적으로 표현됐어요. 제가 맡은 역이 김성칠이라는 치매 걸린 평범한 가장이에요. 영화에서는 재미를 위해 여러 장치들을 많이 넣었는데 연극은 김성칠과 치매 가족을 돌보는 가족들의 이야기가 더 담담하게 그려져요. 부인의 헌신적인 노력이 아주 돋보이죠.


올해 <장수상회>가 무대에 오른 지 5년 되는 해라고요. 지금까지 국내 60여개 도시에서 10만 이상 관객이 봤고, 미국 로스앤젤레스(LA) 무대에도 올랐는데 <장수상회>가 인기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난치병 걸린 주인공이 세상을 견뎌낼 수 있었던 건 가족 그 중에서도 특히 아내가 있었기 때문이에요. 이 연극을 하면서 결국 끝까지 함께 할 수 있는 건 부부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어요. 마지막까지 서로 노력하고 보듬는 대상은 부모도 자식도 아닌 부부인 거죠. 꼭 부부가 아니라도 이 연극을 보면 생각하게 됩니다. 내가 위기에 처했을 때 내 옆에 있는 사람은 누군가? 나는 과연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인가? 늙고 병들면 돈과 명예가 무슨 소용이에요. 옆에 있는 한 사람이 중요하죠. 그런 메시지 때문에 좋아하는 게 아닐까 생각해요.


<장수상회>의 김성칠과 달리 선생님은 몸도 마음도 무척 건강하신데, 비결이 있으신가요?

계속 일을 하는 게 건강의 비결이에요. 우리 직업이라는 게 끊임없이 이해하고 암기하고 몸을 움직이잖아요. 건강을 위해 따로 뭘 하지 않아도 바쁘게 일하면서 스스로 단련이 되는 것 같습니다.


통상 나이 먹으면 암기력이 떨어진다고 하는데 선생님만큼은 예외인가 봅니다.

자꾸 하다 보면 느는 것도 있지만 대사 외는 데 요령이 필요해요. 요령이라는 게 꼼수를 부린다는 뜻이 아니고 효율에 대한 이야기에요. 연극이건 영화건 드라마건 다 같아요. 잘 외우려면 작품을 정확하게 판단하고 분석해야 해요. 주제가 뭐냐, 어떤 주장을 하느냐 등 전체를 볼 줄 알아야 해요. 자기가 맡은 역할을 충분히 파악하고 장면을 이해하면 대사가 내 것이 되는 거죠. 이렇게 꼼꼼하게 이해하고 분석해 놓으면 막혀도 애드리브가 가능합니다. 가급적 작가와 약속한 대로 대사를 하는 게 좋지만 글자대로만 외우면 대사가 살아 움직이지 못해요. 진짜 내가 그 역할 안으로 들어가야죠. 어떤 작품이든 스토리는 간단해요. 중요한 건 작가가 함축해 놓은 의미를 배우가 어떻게 전달하느냐죠.

연극, 영화, 드라마 연기할 수 있는 모든 분야에서 활동하고 계십니다. 현장성을 강조하는 연극은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연습의 강도도 만만치 않은데요. 계속해서 연극을 하시는 이유가 있으신가요?

아주 대단한 배우이자 감독인 올리비아 로렌스가 이런 말을 했어요.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고 드라마는 작가의 예술이며 연극은 배우의 예술이라고. 막이 올라가면 작가, 연출 누구도 틈입할 수 없는 게 연극입니다. 또 연극의 연기는 같은 역할도 맡는 사람에 따라 해석에 따라 달라지는 재미가 있잖아요. <장수상회>의 김성칠 역도 이번에 저와 백일섭 씨가 더블 캐스팅인데 둘의 김성칠이 다를 거란 말이죠. 배우에게 연극 무대는 내가 해석한 인물을 마음껏 펼쳐 보일 수 있는 매력적인 현장이에요. 관객의 반응을 직접 볼 수 있다는 것도 즐거운 일이고요.

수많은 작품에 출연하셨고 그 중에는 시트콤 등 예상치 못한 모습도 보여주셨어요.

시트콤도 연기를 해야 하는 드라마죠. 시추에이션 코미디는 무성영화시대부터 있었던 코미디 장르에요. 설정 자체가 희극인 거지 극이 아니진 않거든요. 시트콤 할 때 작가와 연출에게 말했어요. 페이소스가 있어야 한다, 희극의 본질은 풍자다. 억지 웃음이 아니라 있을 법한 상황에서의 웃음과 코끝이 시큰해지는 감동이 함께 있어야 한다고요. 결국 이 또한 진실성이 있어야 하는 거죠. 야동순재도 있을 법한 일이잖아요. 그것도 자식이 매일 주식을 한다는데 그게 뭔가 확인하다 그렇게 된 거잖아요. 모든 건 다 같은 연기에요. 극의 내용이 진실하게 잘 짜여 있으면 그 안에서 못할 게 없죠.

가천대학교 석좌교수로 재직중이시죠. 1998년 세종대학교를 시작으로 학생들에게 연기 워크샵 지도를 하신지 20여 년이 넘었습니다. 연기를 하는 학생들에게 가장 강조하는 건 어떤 것인가요?

말한 것처럼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고 내 것으로 만들라고 하죠. 11월에 연극 <리어왕> 투어를 하는데 나는 지금부터 책을 읽으면서 공부를 해요. 같은 작품이라도 번역마다 뉘앙스나 쓰는 어휘가 다르기 때문에 출판된 번역본 대부분을 읽어요. 읽고 분석하고 넣고 빼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방향을 잡아나가죠. 그리고 두 번째는 작품을 제일 처음 보는 사람을 대상으로 극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해요. 연극을 처음 보는 사람이 네 연기를 보고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요. 관객들에게 친절해야 해요. 자기는 공부하고 자주 봤으니까 알지, 그런데 우리는 관객에게 보여주는 예술이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장수상회>는 친절하고 좋은 공연인가요?

그렇죠. 연극을 처음 보시는 분들도 와서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좋은 공연이에요. 저와 손숙 씨, 백일섭, 박정수 씨를 비롯한 우리 연기자들이 마음에 저절로 스며들도록 연기할 겁니다. 코로나19로 다들 힘든데 방역수칙을 잘 지키면서 연극 보러 오세요. 저희가 팬데믹을 없애진 못하지만 여러분의 정서에 따뜻하게 가 닿을 수 있는 그런 메시지를 전달하겠습니다.
대배우의 시간 속엔 자신의 업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진하게 녹아 있었다. 배우 생활 65년, 어느 한 순간도 허투루 보내지 않은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축복의 세월. “전세계적으로 같은 상황이니 지치지 말고 조금만 더 견뎌냅니다. 이럴 때 버텨내기 위해 예술의 존재하는 것이니 아름다운 것들 많이 보세요. 진선미라는 말이 있죠. 아름다움이 바탕이 되면 선한 것을 알고 마침내 진리를 깨치게 되는 거죠. 예술이 바탕이 되는 시간들 누리시길 바랍니다.” 완성이 없고 끝이 없다는 예술의 세계에서 오늘도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 이순재 대배우에게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