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를 결정할 때 ESG 요인을 적극적으로 반영하겠다. 각 기업은 TCFD(기후변화 재무정보공개 태스크포스) 권고안에 기반을 둔 기후변화 성과를 밝혀야 한다.”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인 미국 블랙록(BlackRock)의 래리 핑크 CEO(최고경영자)가 지난해 초 주요 기업 CEO에게 보낸 서한에 담긴 한 대목이다. 골자는 ESG 성과를 관리하라는 것이었다.
블랙록은 2조 달러가 넘는 돈을 굴리는, ‘월가의 제왕’으로 대접받는다. 이런 회사 CEO가 낸 목소리는 무게감이 묵직할 수밖에 없다. 블랙록으로부터 투자 받은 기업은 앞으로 경영실적 외 ESG 관련 수치도 꼼꼼히 챙겨야하는 숙제를 안게 됐다.
이런 가운데 블랙록은 실제 석탄을 사용해 얻은 매출이 25%가 넘는 기업 채권과 주식을 즉각 처분했다. 몇 해 전 미국 내 고교 총기사고 이후 총기제조사와 유통업체에 대한 투자를 재검토 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막연하게 ESG가 현실 속으로 훅 들어온 상징적 사례다. ESG는 환경(Environment), 사회(Social), 지배구조(Governance)를 뜻한다. 이전까지는 CSR(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기업의 사회적 책임), 즉 사회공헌을 했느냐 여부를 두고 기업 가치를 매겨왔다면 이제는 상황 자체가 달라졌다.
코로나19 장기화 이후 이런 전염병이 일어난 근본 원인에 대한 고찰이 세계적으로 일어났다. 단순 이윤 추구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자본주의 자체가 환경에 이율배반적이며 약탈적이란 결론에 이르렀다.
단순히 개별 기업 성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ESG를 소홀히 다뤘다가는 어느 순간 회사가 없어질 수 있다는 위기감이 팽배해질 정도로 사회 분위기가 달라졌다.
ESG 투자의 근원을 찾아 올라가 보면 2006년 UN이 투자 결정 과정에서 ESG 요소를 반영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만든 PRI(책임투자원칙)가 있다. 이 준칙이 ESG에 기반한 투자의 시발점이 됐다. 여기에 따라 실제 투자자 움직임이 달라졌다. ‘큰손’ 캘리포니아교직원연금과 영국성공회펀드 등이 돈을 맡긴 미국 행동주의 투자사 엔진넘버원은 지난해 12월 엑슨모빌 이사회를 향해 “전체 이사진 10명 중 풍력기업 출신 CEO를 비롯해 신재생에너지 전문가, 총 4명을 신규 이사로 선임하라”라는 공식 서한을 보낸 것이 대표적인 예다. 엔진넘버원은 “수십 년 안에 망해버릴지 모르는 기업의 사업 방향을 바꾸기 위해 신재생에너지 전문가가 필요하다”라고 주장했다.
우리나라도 이런 흐름에 적극 동참하는 분위기다. 국민연금은 2년 전 스튜어드십코드(기관투자자 의결권 행사 지침)를 도입한 이후 사회 책임투자를 늘렸다. 더불어 2022년까지 ESG 투자를 전체 기금 자산 절반 수준까지 확대하겠다고 공언했다.
정경선 HGI 의장은 “‘ESG = 돈’이라는 공식은 이제 일상화됐다고 볼 수 있다. ESG에 적극적으로 신경 쓰지 않을 경우 정부 규제나 고객들의 외면, 투자자 회피 등 각종 위험에 노출돼 더 큰 손실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물론 기업이 투자자만 의식해서 ESG를 챙겨야하는 것은 아니다. 또 대기업만 추구할 수 있는 기업가치도 아니다. “ESG는 단순한 리스크 관리 지표가 아니라 새 기회를 창출할 성장동력”이란 이재혁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의 말을 듣고 보면 중소기업에도 ESG는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 더불어 ESG에 대한 관심이 곧 기업가치 증대로 이어질 수 있다.
류재욱 네모파트너즈 총괄사장은 “ESG에 대한 국내 경영자 의식 수준은 아직 초보적인 단계에 머물러 있는 것이 사실이다.
다만 기후 환경 리스크, 인권, 안전 등 환경 성과와 사회가치를 제품, 서비스에 담으면서 주요 지표를 관리하면 중소기업의 지속 가능 경영에도 큰 힘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다만 대기업에 비해 중소기업이 이런 가치에 대해 아직 인식이나 대응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이하 전경련)가 글로벌 ESG 확산 추세가 국내 산업과 기업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15개 증권사 리서치센터장을 대상으로 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글로벌 경영을 위한 ESG 중 환경 분야 대응이 가장 중요한 것으로 나타났다.
아울러 현재 국내기업의 ESG 대응 수준은 선진국 10점을 기준으로 대기업이 7점인 반면, 중소기업은 4점에 불과해 중소기업의 ESG 대응 여력 확보가 필요한 것으로 나타났다.
전문가들은 실천이 매우 어렵지 않다고 입을 모은다. 오히려 ESG 경영 확산으로 석유제품·석유화학·철강산업에 타격이 큰 반면, 반도체·이차전지, 친환경 산업 등에서는 전망이 밝은 것으로 조사되기도 했다. 풀무원 사례가 대표적이다. 코로나 장기화로 배달음식, 택배 이용량이 급증한 상황에서 풀무원이 추진한 ‘환경을 생각하는 포장 3R 원칙’은 큰 호응을 얻었다. 풀무원샘물 생수병과 아임리얼쥬스, 드레싱 소스 등 페트병을 활용하는 제품 겉면에 ‘수분리 라벨’을 붙여 재활용이 쉽도록 했는가 하면 국산 연두부, 나또 제품 용기에 탄산칼슘을 혼합해 연간 플라스틱 사용량을 30% 이상 줄였다. 그 결과 지난해 다우존스 지속경영지수(DJSI) 평가에서 식품산업 부문 116개 글로벌 기업 중 6위에 올랐다. 포장제품을 제조, 판매하는 업체면 적극 도입해볼 만하다.
금융권의 ESG 동향도 참고해야 한다. KB금융은 중소기업 대출 심사에 ESG 등 비재무 정보를 반영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자체 여신기본강령이나 모범규준에 따라 사회공익에 반하는 불건전 기업에 대한 여신이나 투자는 엄격하게 제한하겠다는 방침이다. 하나금융도 여신업무 내부 기준에 환경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업체에는 간접적으로 여신을 제한해 온실가스 저감 등의 친환경 운동 동참을 유도하고 있다. 따라서 국내 건설사, 중소기업은 이런 흐름에 면밀히 대응, 적극적인 경영 개선을 해야 할 때다.
한편, 김봉만 전경련 국제협력실장은 “글로벌 시장에서는 환경(E)의 중요성이 큰 반면, 국내에서는 상대적으로 사회(노동)(S)과 지배구조(G)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어, 국내 기업은 안팎으로 부담이 커질 수 있다. ESG 대응에 있어 국내외를 나눌 필요가 없는 만큼, 글로벌 스탠더드에 부합하는 일관되고 투명한 평가체계의 확립이 중요하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