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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기술규제 동향과 국내 시험인증기관의 전략

시험인증산업은 우리 산업과 경제, 나아가 우리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도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디지털통상, 기후변화 등 해외기술규제가 증가할 것으로 보이는 가운데,
우리 기업의 대응과 시험인증기관의 경쟁력 강화를 위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글 | 이광호 과학기술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글로벌 무역환경의 변화와 기술규제 동향

냉전체제가 종식된 이후 세계경제는 글로벌화가 빠른 속도로 진전되었으며, 1995년 설립된 WTO를 중심으로 자유무역주의가 보편화되었다. 하지만 최근 세계경제는 변화의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디지털 플랫폼을 기반으로 한 전방위적 디지털전환은 코로나 팬데믹에 의해 가속화되었고, 기후변화가 가시화됨에 따라 이에 대응하기 위한 국가별 대응이 구체화되고 있다. 무엇보다 최근 미·중 기술패권 경쟁은 글로벌 공급망의 재편과 함께 자국이익 우선의 보호무역주의 강화로 이어지고 있다. 신기후체제와 글로벌 보호무역주의는 전체 GDP에서 제조업과 국제통상 비중이 높은 우리 경제에 직접적 타격을 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과거 보호무역에서는 주로 관세부과가 중심이었다면 최근 보호무역은 기술규제가 중심인 점이 특징적이다. <그림 1>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점차 뚜렷하게 무역기술장벽(TBT)이 강화되는 경향이 나타난다. 기술규제 관점에서 살펴보면, 과거 WTO TBT 중심으로 기술규제가 적용되던 것에서 벗어나 첨단기술 분야에서는 새로운 권역별 협정에 의해 작동하는 양상이 늘고 있다. 특히 전 세계적으로 디지털전환이 본격화됨에 따라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디지털통상이 확대되고 있으며, 각국의 첨예한 이해관계를 반영한 다자·양자협정이 증가하는 추세다.
대표적인 다자협정으로는 USMCA2), CPTPP3), RCEP4) 등이 있으며, 양자협정으로는 USJDTA5), US-EU TCC6)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협정에서는 디지털통상 관련 조항에 데이터 현지화 조치(data localization) 등 기존에는 다루지 않았던 기술규제가 포함되어 있다. 특히 표준과 적합성평가에 대한 참여국 간 협력을 강조함으로써 새로운 경제블록 형성을 시사한다. 또한 EU는 2021년에 세계 최초로 발표한 AI 규제법안에 적합성평가 방식을 포함하였는데, 이를 통해 AI 분야 기술규제를 선도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도 주목할 만하다. 한편 기후변화와 관련해서는 종래 강제성이 약했던 국제협약을 대체하는 통상과 연계된 신기후체계가 발달함에 따라 세계 각국은 탄소세 도입을 늘리고 있다. 특히 EU는 탄소국경조정제도를 예상보다 빠른 2026년부터 본격적으로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국가별 이산화탄소 배출량 감축의무 부여와 함께 개별 기업에게도 친환경에너지 사용과 탄소배출량 감축 의무를 규제의 형태로 실시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미 국내 수출 대기업에게 큰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는 RE100과 더불어 각종 기후변화대응 관련 기술규제가 국내외적으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국내 중소·중견기업의 대응과 시험인증기관의 역할

현재 기업들은 ESG 경영이슈에서 평가에 대한 대응을 가장 많이 논의하고 있다. ESG 경영이 기업가치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한 여러 연구들은 기업이 경영과정에서 경제적, 사회적, 환경적 부분을 모두 감안하지 역대 정부의 많은 규제개선 노력에도 국내 기업의 규제대응 역량은 여전히 취약하며, 자본력이 취약한 중소·중견기업은 더욱 그러하다. 과학기술정책연구원이 조사한 결과7)에 따르면 국내 중소기업은 주로 인증, 기술기준, 표준 등 대표적인 기술규제 대응에 있어 비용과 시간뿐만 아니라 관련 정보와 전문성 부족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다. 더구나 디지털전환과 저탄소전환 등과 같은 글로벌 기술규제 변화에 대해서는 국내 규제대응보다 더 큰 부담을 느끼고 있다. 현재는 각 분야별 협회나 단체를 통한 공동대응을 주로 하고 있으나 구체적 대응전략을 마련하기에는 인력, 정보, 기술, 재원 등 모든 면에서 부족하다.
특히 디지털통상이나 기후변화대응과 관련해서 국제통상질서나 국가별 규제방식의 변화가 심하고 복잡한 규제준수 절차나 검증자료 확보 등에 있어 중소·중견기업은 접근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더욱 본질적인 문제점은 보통 내부에 규제대응 조직이 있는 대기업과는 달리 중소·중견기업은 국내외 규제 대응에 있어 경험과 지식이 체계적으로 축적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즉, 유사한 규제를 대응함에 있어 시간과 비용이 줄어들지 않고 기업 내부에 조직적 대응역량이 쌓이지 않는다. 이는 많은 중소·중견기업이 규제대응에 대해 소극적이고 부담으로만 인식할뿐 규제변화를 새로운 사업기회로 전환하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상황은 중소·중견기업이 디지털통상 및 기후변화대응과 같은 새로운 규제 흐름에 휩쓸리게 만들 수 있다.
한편 국내 시험인증기관은 정부의 기술규제 업무를 대행함으로써 국민안전을 강화하고 시장질서를 유지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또한 해외 시험인증기관 의뢰 시 발생할 수 있는 기술유출을 방지하고 양질의 고용창출이 가능한 고부가가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즉, 시험인증기관은 제조업과 수출 비중이 높은 한국 경제의 안정적 성장을 위해 필수적인 인프라이다. 나아가 시험인증기관은 과거 출연연이 담당했던 중소기업 기술지원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중소·중견기업 혁신역량 제고에 기여한다.

또한 국내 시험인증기관은 전국 주요 지역에 다수의 분원을 갖고 있어 지역혁신을 위한 현장밀착형 지원도 수행하고 있다. 국내 주요 시험인증기관은 정부정책과의 밀접한 연계와 더불어 태생적으로 공공성이 강한 특징을 갖고 있다. 이는 1961년 최초 제정된 공업표준화법 이래로 품질경영촉진법(1993년), 국가표준기본법(1999년) 등에서 이들 기관의 공공적 역할을 강조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글로벌 무역환경 변화와 규제강화 움직임은 국내 시험인증기관에게 새로운 변화를 요구한다. 보호무역주의 강화, 기후변화대응 및 환경규제 증가, 다자·양자협정 확대, 국가별 상이한 규제체계 등은 주로 국내 기술규제 관련 역할을 수행해 오던 국내 시험인증기관에게 글로벌 경쟁력 강화가 선택이 아니라 필수적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국내 시험인증기관의 과제와 경쟁력 강화방안

시험인증기관은 본질적으로 공공성과 시장성을 동시에 충족해야 하는 양면성을 갖고 있다. 즉, 정부의 기술규제 업무 대행을 통해 국민안전 보호와 시장질서 유지 역할을 수행하는 동시에, 기술발전과 시장변화에 대응하여 글로벌 시험인증기관과의 경쟁에서 생존해야 함을 의미한다. 대표적인 글로벌 시험인증기관인 미국 UL이나 독일 TUV의 경우를 살펴보면, 150년 이상의 업력과 함께 끊임없이 이러한 양면성을 충족하기 위해 노력해왔음을 알 수 있다.8)
국내외 시험인증기관의 발전경로를 공공성·시장성과 함께 전문분야의 특수성·종합성 측면에서 살펴보면, 주요 기관들은 대부분 특정분야 공공성 위주로 출발하였지만 현재는 종합적이고 시장성을 지향하는 기관으로 성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즉, 지속적인 신기술·신산업 분야로의 확장과 함께 M&A를 통한 규모확대가 글로벌 시험인증 시장에서의 경쟁우위 확보요소이다. 국내 시험인증기관도 2010년을 전후하여 기관 간 통합이 이루어졌지만, 아직 글로벌 기관과 비교하면 다루는 분야의 폭이나 기관 규모 측면에서 큰 격차를 갖고 있다.
그렇다면 급변하는 국내외 상황을 감안할 때 국내 시험인증기관의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한 해답을 어디서부터 찾아야 할까? 시험인증기관의 양면성을 고려한 발전 방안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첫째, 시험인증산업 진흥을 위한 제도적 기반마련이 필요하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시험인증산업은 제조업 고도화와 고부가가치 서비스 창출이 가능한 성장동력이다. 지금까지 시험인증 분야는 제조업 인프라로서 공공성만 강조되었지만, 선진국 수준의 성장을 위해서는 별도의 진흥법과 기본계획을 마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특히 최근 기존 제조업·서비스업의 디지털전환과 기후변화대응과 같은 사회적 수요 증대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생태계 자체의 구성과 건전한 발전을 전략적으로 유도하는 것이 요구된다.
둘째, 국내시장 확대와 기관 신뢰성 제고를 위한 정부역할의 제고가 요구된다. 우선 정부 R&D사업 성과평가 시 공인 시험·인증 결과의 적극적 활용을 통해 전체 수요를 확대하고, 신산업 분야 정책수립 시 시험·인증 성과의 설계·획득 계획을 포함시켜 신기술 사업화와의 연관성을 높여야 한다. 이와 더불어 정부는 시험인증기관에 대한 관리·감독 강화를 통해 과열경쟁과 기관난립을 방지하고 시험인증 및 시험인증기관에 대한 수요자의 신뢰도를 제고시켜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특히 민간사업자의 무분별한 인증 남발에 대해서 강도 높은 심의가 필요하다.
셋째, 선도 혁신주체와의 연계를 통한 시험인증기관의 혁신역량 제고가 필수적이다. 현재 KCL을 비롯한 주요 시험인증기관들은 석·박사급 우수인력을 다수 보유하고 있음에도 대학 및 출연연과의 연계가 미흡하다. 글로벌 선도 시험인증기관들은 주요 혁신주체와의 강한 교류·협력으로 특히 고부가가치 신기술·신산업 분야 서비스에서 강점을 갖는 것과 대조적이다. 이미 평준화되어 가격경쟁이 치열한 분야보다는 차별성을 갖는 신규시장을 개척하는 것이 어렵더라도 가야할 길이다. 이를 위해서는 내부적으로 교육·훈련을 강화하는 전문 프로그램을 확대하는 것도 바람직하다.
넷째, 중장기적 관점에서 거버넌스 개선을 시도해야 한다. 현재 국내 시장에서 매출 1위는 해외 시험인증기관의 한국지사이고 향후에는 글로벌 선도기관의 국내시장 잠식이 더 빨라질 가능성이 크다. 반면 국내 주요 기관들은 점진적으로 성장 중이나 비영리법인의 특성상 중장기적 계획수립과 투자재원 유치에 한계가 있다. 책임성을 기반으로 한 기관의 자율경영 확대는 글로벌 기관과의 경쟁에서 반드시 필요하지만 현재의 법적 위상과 경영체제에서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UL의 영리·비영리 법인분할, TUV의 지주회사 구조 등 다양한 거버넌스의 장·단점과 각 기관별 상황을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현재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변화가 필요하다. 물론 철저한 사전준비와 정책적 지원이 뒷받침되어야 하며, 정부의 강제보다 시장원리 기반의 자율적 선택이 존중되어야 한다.
국내 주요 시험인증기관은 그동안 정부와 밀접한 유대 속에 안정적 성장을 지속해 왔지만, 이제 선택의 기로에 서있다. 문제는 국내외 환경변화는 이들 기관의 변화와 선택의 시간을 무한정 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산적한 어려움을 풀어내기 위해 모두가 지혜를 공유할 때이다.

1) http://i-tip.wto.org/goods/Forms/GraphView.aspx?period=y&scale=ln (해당 자료는 2021년까지의 데이터를 포함함)
2) United States-Mexico-Canada Agreement Implementation Act : 미국, 멕시코, 캐나다 등 3국 참여
3) Comprehensive and Progressive Agreement for Trans-Pacific Partnership : 일본, 호주 등 11개국 참여, 2017년 미국 탈퇴
4) Regional Comprehensive Economic Partnership : 태국 등 아세안 10개국과 한·중·일·호주·뉴질랜드 참여
5) US-Japan Digital Trade Agreement : 미국과 일본 간 디지털통상 양자협정
6) US-EU Trade and Technology Council·TTC : 미국과 EU 간 첨단기술을 중심으로 한 양자협정
7) 이광호 외(2017), ‘기술규제 개혁을 위한 의제설정 연구사업, 제2권: 신생기업의 기술규제 대응현황 및 지원방안’ 참조
8) 이광호 외(2018·2019), ‘기술규제 개혁을 위한 의제설정 연구사업’ 중 국내외 시험인증기관 부분 참조

과학기술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으로 KDI 초빙연구위원, STEPI 기술규제연구센터장을 역임했다.
기술규제, 기술·산업 융합, 소재부품산업 등을 연구하고 있으며, 국가기술표준원 기술규제위원회 위원, 과기정통부 소재부품장비 제도실무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