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 카뮈의 소설 ‘페스트’의 마지막 대목에는 “페스트균은 결코 죽거나 소멸하지 않으며 언젠가는 인간들에게 불행과 교훈을 가져다주기 위해서 또다시 저 쥐를 흔들어 깨워서 어느 행복한 도시로 그것을 몰아넣을 것”이라는 구절이 있다. 백신과 항생제를 다룰 수 있게 된 이후 인류는 감염병과의 전쟁에서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했다. 실제 천연두 등 몇몇 질병은 박멸에 성공했다. 하지만 여전히 감염성 질환은 전체 사망의 25%를 차지한다. 여기에는 전 세계에서 1억 8,000만 명이 감염되고 380만명이 사망한 코로나19도 포함된다. 코로나19가 우리의 일상을 바꿨다는 말이 이제는 지겨울 지경에 이르렀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 논의도 활발하다. 비대면(언택트) 서비스인 게임, 메타버스, 화상 업무, 이커머스가 주류로 떠오른 건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다. 이와 함께 주목받은 분야가 있다. 감염병을 치료할 수 있는 산업인 제약·바이오다.
코로나19 백신을 개발한 미국의 화이자는 백신 출시를 한 달 앞둔 지난해 11월 ‘과학이 이긴다(Science Will Win)’고 쓴 문구를 건물 외벽에 내걸었다.
지난해 코로나19의 공습에 속수무책으로 쓰러지기 바빴던 인류지만 1년 만에 파훼법을 찾아냈다. 이 과정에서 과학 기술의 진보는 덤이다. 팬데믹의 장기화로 mRNA, PCR, 바이러스, 항체, 진단키트와 같은 생소했던 단어들이 익숙해졌다.
코로나19 예방을 위해 접종하는 화이자와 모더나의 백신은 mRNA 방식을 활용했다. mRNA는 설계도 원본인 DNA를 사용하기 쉽게 만든 복사본인데 이를 활용하면 우리 몸 내에서 원하는 단백질을 만들어낼 수 있다. 코로나19 백신은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인체에 달라붙을 때 쓰는 돌기(스파이크)의 mRNA로 만들었으며 인체는 이를 인식해 실제 코로나19바이러스가 우리 몸에 침입했을 때 바이러스를 없앤다. 1년 전까지만해도 mRNA를 활용한 백신 개발에 의구심을 품는 이들이 많았다.
화이자와 모더나가 코로나19 백신을 세상에 내놓기 전까지 mRNA를 활용한 백신을 미국 식품의약국(FDA) 등 각국의 의약품 규제기관이 승인했던 사례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통상적으로 백신 개발에 걸리는 시간인 15~20년을 1년으로 크게 단축했던 만큼 안전성이 의심된다는 지적도 잦았고, 모더나는 코로나19 백신 개발 이전까지 상용화는커녕 FDA의 품목허가 승인조차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조그마한 스타트업이었다.
지난해 여름까지 모더나는 실적보다 코로나19 백신 개발로 시장을 현혹해 주가를 부양하고 이를 통해 경영진 배만 불리려 한다는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결과는? 아시다시피다. 모더나의 1분기 매출액은 2조 1,800억 원으로 지난해 1분기 90억 원에서 250배 뛰었다. 인류는 바이러스와의 전쟁에서 활용할 수 있는 신무기를 얻었다. 1년 내 개발할 수 있는 mRNA 백신이 신종감염병에 효과적인 것을 알게 된 만큼 코로나 이후의 싸움에서도 인류가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제약사는 어디일까. 활명수로 유명한 동화약품이다. 1897년 동화약방에서 시작한 역사는 1896년 설립된 스위스의 다국적 제약사 로슈에 비견된다. 하지만 국내 제약바이오산업의 성장은 쉽지 않았다. 국산 1호 신약은 1999년 7월 15일 위암치료제 선플라가 식약처의 허가를 받음으로써 탄생했다. 동화약품의 설립부터 자그마치 100년 이상 걸렸다. 코로나19 이전부터 전체 벤처펀드 투자액의 3분의 1이 바이오 분야 벤처기업에 몰렸다. 창업 초기기업임에도 수백억 원대 투자를 유치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벤처캐피털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바이오 분야 투자액은 1조 1,970억 원으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고, 정부도 2030년까지 세계시장 점유율 6% 확보를 약속하고 매년 4조 원을 투자하기로 결정했다. 업계에서도 ‘돈이 없어 회사를 차리지 못하는 건 아니다’고 입을 모은다.
하지만 여전히 K바이오는 걸음마 상태다. 모더나가 코로나19 백신 개발에 투입한 R&D 자금이 20억 달러(약 2조 2,500억 원)인 반면 국내에는 매출 2조 원이 넘는 제약바이오기업이 없다.
2015년 한미약품의 기술수출로 ‘바이오’라는 산업이 시장에 인상을 남긴 지 겨우 6년. 성과를 내기에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일각에서는 국내의 바이오 열풍이 2000년대 초반 ‘닷컴버블’의 판박이라고 주장한다.
바이오산업 고평가는 코로나19로 인한 혼란 속 사상 최대 유동성을 바탕으로 형성된 ‘버블’이라는 게 요지다. 임상시험 결과가 좋을 것처럼 발표해 개미 투자자들의 자금을 모은 뒤, 주가가 오른 주식을 처분하는데 급급했던 일부 바이오벤처의 경영진도 부정적인 인식에 한몫 했다. 하지만 국내 바이오산업은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전통 제약사뿐 아니라 바이오 벤처들도 꾸준히 신약 후보물질의 기술수출에 성공하고 있으며 셀트리온과 삼성바이오로직스 역시 글로벌 톱10 제약사와 맞설 정도로 성장했다. SK바이오팜은 독자 개발한 신약을 미국 시장 내 성공적으로 출시했고 셀트리온은 코로나19 치료제를 내놓았다.
팬데믹 속에서 한국은 코로나19 백신의 글로벌 생산기지로 거듭났다. 지난해 진단키트 열풍 역시 그동안 쌓아둔 바이오산업의 잠재력이 폭발한 사례 중 하나다. 닷컴버블 이후 새롬기술, 싸이월드 등 수많은 기업이 사라졌다. 하지만 네이버, 엔씨소프트, 카카오 등은 살아남아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바이오 열풍 속에서도 누가 살아남고 사라질지 모른다. 하지만 살아 남은 기업이, 지금 걸음마 단계인 K바이오가 코로나19 이후 다른 이름으로 나타날 신종 감염병의 공격에는 인류를 살리는 구원자가 돼 있을 것이다.